국가별 SMR 추진 현황 및 지원 정책 심층 분석 -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대한민국

목차
서론: 정부의 손에 달린 SMR의 미래
소형모듈원전(SMR)은 더 이상 공상과학 소설이나 학계의 연구실 안에 머물러 있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후 변화 대응과 에너지 안보 확보라는 두 가지 거대한 시대적 과제, 그리고 AI 데이터센터와 전기차 보급 등으로 폭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해답으로, SMR은 전 세계 에너지 시장의 중심으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거대한 기술 혁신은 순수한 시장 논리만으로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SMR 기술은 수십 년의 연구개발 기간과 수조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초기 투자 비용을 필요로 합니다. 민간 기업 입장에서 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리스크입니다. 특히 신기술이 연구개발 단계를 지나 상용화에 이르기까지 겪는 자금난과 시장의 외면, 이른바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을 건너기 위해서는 정부의 강력하고 일관된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민간 투자자들은 기술의 불확실성(과연 설계대로 작동할 것인가?), 수년이 걸리는 엄격한 인허가 과정(규제 당국은 허가를 내줄 것인가?), 그리고 완공 후의 시장 경쟁력(다른 에너지원보다 저렴할 것인가?) 등 수많은 위험 요인 앞에서 투자를 망설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각국 정부의 역할이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합니다. 현재 세계 각국은 미래 에너지 패권을 차지하고 자국의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SMR 기술 개발에 막대한 국가적 자원과 정책적 지원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에너지 정책을 넘어, 반도체나 우주항공 산업과 같이 국가의 기술 리더십과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기술 국가주의(Techno-nationalism)'** 경쟁에 가깝습니다. 이 경쟁은 크게 두 가지 트랙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기존 대형원전 기술을 소형화한 3세대+ 경수로 SMR(뉴스케일, i-SMR 등)로, 빠른 상용화를 목표로 합니다. 다른 하나는 소듐고속로, 고온가스로 등 안전성과 효율성을 한 차원 높인 4세대 첨단 원자로(테라파워, 엑스에너지 등)로, 미래 시장의 '게임 체인저'를 노리는 경쟁입니다. 이 글에서는 SMR 기술 패권 경쟁의 선두에 있는 미국, 유럽의 전통 강호인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실용적인 접근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캐나다와 대한민국이 각각 어떠한 고유의 지원 정책과 전략을 통해 자국의 SMR 산업을 육성하고 있는지 국가별로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비교해보고자 합니다. 이들의 각기 다른 접근법을 통해 우리는 SMR의 미래가 기술 자체만큼이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책의 설계에 달려있음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 시장을 움직이는 강력한 '당근' 전략과 현실의 과제
SMR 기술 개발과 상용화에 가장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는 국가는 단연 미국입니다. 미국은 정부가 특정 기술이나 기업을 '국가대표'로 지정하기보다, 시장 친화적인 강력한 '인센티브'라는 당근을 제공하여 수많은 민간 기업의 자발적인 참여와 혁신 경쟁을 유도하는, 이른바 **'경쟁형 생태계 조성'** 전략을 사용합니다. 미국 SMR 정책의 가장 핵심적인 축은 바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입니다. 이 법안은 SMR을 포함한 모든 무탄소 에너지원에 대해 전례 없는 수준의 파격적인 세금 인센티브를 제공합니다.
💡 IRA의 핵심 인센티브: PTC와 ITC
- 생산세액공제(PTC, Production Tax Credit): 발전소가 생산하는 전력량 1MWh당 일정 금액의 세금을 공제해주는 제도입니다. 특정 노동 조건을 충족할 경우, MWh당 최대 27.5달러의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SMR의 초기 높은 발전 단가를 직접적으로 낮춰, 천연가스 등 다른 발전원과 가격 경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 투자세액공제(ITC, Investment Tax Credit): 발전소 건설에 투입되는 총 투자비의 일정 비율(기본 30% 이상)을 세금에서 직접 공제해주는 제도입니다. 이는 수조 원에 달하는 초기 건설 비용의 부담을 크게 낮춰, 민간 투자자들이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을 일으키기 훨씬 용이하게 만듭니다.
또한, 에너지부(DOE)가 주관하는 **차세대 원자로 실증 프로그램(ARDP, Advanced Reactor Demonstration Program)**은 미국 SMR 정책의 또 다른 강력한 엔진입니다. 이는 단순히 연구개발비를 지원하는 것을 넘어, 상용화 가능성이 높은 차세대 SMR 모델을 선정하여 **첫 상용로 건설 비용의 절반에 달하는 수십억 달러의 자금을 정부가 직접 지원**하는 파격적인 프로그램입니다. 현재 이 프로그램을 통해 4세대 고온가스로(HTGR) 개발사인 **엑스에너지(X-energy)**와 소듐고속로(SFR) 개발사인 **테라파워(TerraPower)**가 각각 다우 케미칼, 퍼시피코프 등과 함께 실제 상용 원자로 건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강력한 지원책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시장 중심' 접근법은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뉴스케일파워의 첫 상용 프로젝트(CFPP)가 정부의 막대한 지원 약속에도 불구하고, 최종 고객들의 참여 부족으로 좌초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이는 아무리 강력한 '당근'을 제시해도,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경제성과 안정적인 수요처 확보라는 시장의 냉정한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미국은 SMR 산업의 성공에 필수적인 **공급망 구축**이라는 거대한 과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특히 4세대 첨단 원자로의 필수 연료인 **'고순도 저농축 우라늄(HALEU)'**은 현재 전 세계 공급망을 러시아가 독점하고 있어, 미국의 에너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미 정부는 HALEU의 자국 내 생산을 위해 수십억 달러의 예산을 투입하며 공급망 재건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이처럼 미국은 **'직접 자금 지원(ARDP) + 세금 인센티브(IRA) + 규제 합리화(NRC의 신규 인허가 절차 개발)'**라는 강력한 삼각 편대를 통해 민간 기업들이 마음껏 SMR 기술 개발에 뛰어들 수 있는 거대하고 역동적인 운동장을 만들어주는 동시에, 공급망 구축과 같은 현실적인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양대산맥: 영국의 총력전과 프랑스의 기술 자존심, 그 이면의 고민
전통의 원자력 강국인 유럽의 영국과 프랑스 역시 미국의 도전에 맞서 SMR 패권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두 국가는 미국의 시장 중심 접근법과는 달리, 정부가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을 취하지만 각자의 산업 구조와 역사적 배경에 따라 뚜렷한 전략적 차이를 보입니다.
먼저 영국은 정부가 직접 '컨트롤 타워'가 되어 SMR 산업 전체를 이끄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책을 펼칩니다. 2023년 설립된 '위대한 영국 원자력(GBN, Great British Nuclear)'은 영국의 SMR 전략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기술 선정부터 부지 확보, 투자 유치, 전력 판매 계약까지 전 과정을 정부 주도하에 지휘합니다. GBN은 현재 영국에 건설할 최적의 SMR 기술을 선정하기 위한 다단계 경쟁을 진행 중입니다. 1단계에서 롤스로이스 SMR, GE-히타치, 웨스팅하우스 등 6개의 유력 후보군을 선정한 데 이어, 최종 사업자 선정을 위한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 경쟁의 최종 승자에게 최대 200억 파운드(약 34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재정 지원과 장기적인 사업권을 약속하며, 자국 SMR 산업의 빠른 성장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신중하고 체계적인 접근 방식은 '시간'이라는 기회비용을 낳고 있습니다. 최종 사업자 선정이 지연될수록, 캐나다나 미국 등 경쟁국들이 먼저 상용 SMR을 가동하여 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반면 프랑스는 자국이 보유한 세계 최고 수준의 원자력 기술력과 인프라를 바탕으로 SMR 시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전략의 중심에는 세계 최대의 원전 기업인 국영 전력공사(EDF)가 있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의 국가 재건 계획인 '프랑스 2030'의 10대 핵심 과제 중 하나로 '혁신적인 소형 원자로의 출현과 더 나은 폐기물 관리'를 포함시키고, 여기에 10억 유로(약 1조 4천억 원)의 초기 예산을 배정했습니다. 프랑스의 SMR 개발은 EDF를 중심으로 '누워드(NUWARD)'라는 단일 모델에 국가적 역량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NUWARD는 170MW급 원자로 2기를 묶은 340MW 용량의 SMR로, 프랑스가 수십 년간 축적해온 가압경수로(PWR) 기술과 해군 잠수함용 원자로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되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야심 찬 계획에도 그림자는 존재합니다. 현재 EDF는 노후화된 기존 대형 원전들의 수명 연장과 차세대 대형 원전인 EPR2 건설이라는 막대한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어, SMR 개발에 투입할 재정적, 인적 자원이 충분한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실용주의와 수출 야망: 캐나다와 대한민국의 기회와 도전
미국과 유럽의 거대 강국들 외에도, 캐나다와 대한민국은 SMR 도입과 개발에 가장 적극적이고 실용적인 접근법을 취하는 국가들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캐나다는 광활한 국토와 분산된 인구 구조라는 특성에 맞춰 매우 실용적인 SMR 전략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연방정부가 2020년 발표한 'SMR 액션 플랜'이라는 큰 그림 아래, 전력 수요가 많은 온타리오주, 앨버타주 등 각 주 정부가 실제 부지와 사업자를 선정해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효율적인 연방-주 정부 협력 모델을 구축했습니다. 특히 온타리오주의 전력공사(OPG)는 GE-히타치의 BWRX-300 SMR을 세계 최초의 상업용 그리드 연계 SMR로 건설하는 '달링턴 신규 원자력 프로젝트'를 2028년 완공 목표로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현재 서방 세계에서 가장 빠른 상용화 속도를 보이고 있으며, 전 세계 SMR 산업의 중요한 가늠자가 될 전망입니다. 캐나다는 특히 프로젝트 초기 단계부터 원주민 공동체 및 지역 사회와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사회적 수용성'을 확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이는 다른 국가들이 벤치마킹해야 할 중요한 성공 요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친원전 정책으로의 복귀를 선언한 대한민국은 독자적인 SMR 모델 개발과 글로벌 파트너십이라는 '투트랙 전략'을 통해 'SMR 수출 강국'의 야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대형 원전(APR-1400)을 UAE에 성공적으로 수출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 모델인 'i-SMR(혁신형 SMR)'을 2030년대 상용화를 목표로 개발하며 미래 국가 핵심 수출 산업으로 육성한다는 목표 아래 정부와 민간이 '팀 코리아'를 구성했습니다. 이를 위해 약 4,000억 원 규모의 연구개발 예산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가장 큰 과제는 '시장 접근성'입니다. i-SMR이 기술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도, 북미나 유럽 등 주요 시장에서 인허가를 받고 실제 건설 실적(Reference)을 확보하지 못하면 수출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해외 유수 SMR 기업에 대한 전략적 지분 투자를 병행하는 영리한 전략이 빛을 발합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미국 뉴스케일파워에 1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여 핵심 기자재 공급권을 확보했고, SK와 GS 등은 테라파워, 엑스에너지 등 차세대 SMR 기업에 투자하며 기술 협력과 글로벌 공급망 참여를 동시에 노리고 있습니다. 이는 독자 기술 개발과 글로벌 협력을 병행하며 리스크를 분산하고 성공 가능성을 극대화하려는 한국 특유의 실용주의적 접근법입니다.
결론: 정책의 설계가 곧 기술의 성패를 가른다
이처럼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대한민국 등 세계 주요국들은 각자의 산업 구조, 기술적 강점, 그리고 정치적 상황에 맞는 방식으로 SMR 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시장 중심 인센티브, 영국의 정부 주도형 경쟁, 프랑스의 국가대표 육성 방식, 그리고 캐나다와 한국의 실용주의적 협력 모델 등 구체적인 전략은 다르지만, 그 기저에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초기 시장 창출 없이는 SMR 시대가 결코 열릴 수 없다'는 공통된 인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SMR 패권 경쟁은 단순히 한 번의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마라톤과 같습니다. **1단계는 설계 및 인허가, 2단계는 첫 호기(FOAK)의 성공적 건설, 3단계는 공급망 구축 및 양산 체제 확립, 그리고 마지막 4단계는 본격적인 글로벌 시장 확산**입니다. 현재 미국은 1단계와 3단계에서, 캐나다는 2단계에서,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는 1단계 후반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습니다. 결국 이 경쟁의 최종 승자는 단순히 뛰어난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이 아니라, 이 모든 단계를 성공적으로 완주할 수 있도록 가장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하며, 실효성 있는 지원 정책을 펼치는 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술 개발은 민간의 영역이지만, 그 기술이 꽃을 피울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정부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각국 정부가 펼쳐나갈 정책의 향방과 그 성과가 미래 에너지 기술의 지도를 어떻게 바꾸어 나갈지, 그리고 이 거대한 경쟁 속에서 어떤 국가가 SMR 시대의 진정한 리더로 부상하게 될지 주목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