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R의 심장을 만드는 두산에너빌리티 - 뉴스케일과 엑스에너지 동맹 심층 분석

목차
서론: AI 시대, 에너지 전쟁의 한복판에 선 한국 기업
전 세계가 AI 혁명의 열기로 뜨겁습니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 모델은 우리의 일과 삶을 바꾸고 있지만, 이 화려한 기술의 이면에는 '전력 부족'이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습니다. AI 모델을 훈련하고 운영하는 데이터센터는 이제 '전기 먹는 하마'를 넘어, 국가 단위의 전력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에너지 블랙홀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6년까지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이 현재의 두 배 이상으로 급증할 것이라 경고했으며, 이는 일본 전체의 전력 사용량과 맞먹는 수준입니다. 이처럼 폭발적인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기존의 전력망과 발전 방식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태양광과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는 기후 위기 대응의 중요한 축이지만,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변동하는 간헐성이라는 본질적 한계로 인해 24시간 365일 안정적인 전력이 필요한 데이터센터의 기저부하를 책임지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발전원인 석탄 또는 가스를 사용하는 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흐름이고, 각 국의 환경규제 때문에 쉽지가 않습니다. 당장에 문제를 해결하고자 싸게 에너지를 사용했다가, 나중에 엄청난 규모의 환경비용에 대한 청구서가 나올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이죠.
이 거대한 에너지 전쟁의 판도를 바꿀 가장 현실적인 해법으로 차세대 원자력, SMR(소형모듈원전, Small Modular Reactor)이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미래 에너지 시장의 가장 중심에 한국의 두산에너빌리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 SMR이란 무엇일까요?
SMR은 Small Modular Reactor의 약자로, 이름 그대로 작고(Small), 공장에서 만들어 조립하는 모듈형(Modular) 원자로(Reactor)를 의미합니다. 기존 대형원전이 1,000~1,600MW의 거대한 용량을 가진 맞춤형 건축물이라면, SMR은 300MW 이하의 소형 원자로 모듈을 표준화된 규격으로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뒤, 현장에서는 레고 블록처럼 간단히 조립하여 건설 기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새로운 개념의 원자력 기술입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이제 단순한 부품 공급사를 넘어, 미국 SMR 시장의 기술 표준과 상용화 속도를 결정하는 핵심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수십 년간 대형 원전 기자재를 제작하며 쌓아온 압도적인 제조 역량과 신뢰를 바탕으로, SMR이라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데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오늘 이 글에서는 두산에너빌리티가 미국의 가장 유망한 SMR 기업들과 어떤 동맹을 맺고, 그들의 심장을 만들어내며 미래 에너지 시장의 주도권을 선점하고 있는지, 그 치밀한 전략을 깊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본론 1: '투자'와 '제작' 두 마리 토끼를 잡다: 뉴스케일 파워와의 동맹
두산에너빌리티의 미국 SMR 전략을 논할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름은 단연 뉴스케일 파워(NuScale Power)일 것 입니다. 두산에너빌리티와 뉴스케일파워의 관계는 단순한 협력을 넘어, SMR 생태계 전체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장기적이고 치밀한 전략의 결과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뉴스케일에 단순한 사업 파트너가 아닌, 핵심 지분 투자자로 참여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2019년과 2021년 두 차례에 걸쳐 IBK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내 투자사들과 함께 총 1억 380만 달러(약 1,400억 원)를 투자하며 주요 주주의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부품 수주 계약을 넘어, SMR 시장의 성장 과실 자체를 함께 공유하는 '운명 공동체'가 되겠다는 강력한 선언이었습니다. 이 투자는 두산에너빌리티에게 두 가지 결정적인 이점을 안겨주었습니다.
첫번째로 SMR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핵심 주기기 제작 및 공급에 대한 사실상의 독점적 권리 확보했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 이외 다른 국가의 제조기업들도 역량이 모자란 것은 아니지만, 중국, 러시아 등의 기업들은 국가 보안상 발주가 힘든 상황이고, 제작기술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의 경우에는 제작과 관련한 생태계가 무너져 있어 적기공급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 핵심 주기기(Nuclear Steam Supply System)란?
원자력 발전소에서 가장 핵심적인 설비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핵분열이 일어나는 **원자로(Reactor)**, 뜨거워진 물(냉각재)의 열을 이용해 증기를 만드는 **증기발생기(Steam Generator)** 등 SMR의 심장과 혈관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는 기술의 집약체이자 가장 높은 부가가치를 지닌 부품으로, 이를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은 원전 산업의 핵심 경쟁력을 의미합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투자를 통해 뉴스케일의 VOYGR SMR 발전소에 들어갈 원자로 모듈의 상부구조물 전체를 생산할 우선권을 확보했습니다. SMR 기술의 표준을 이끌어갈 가능성이 가장 높은 기업의 최대 제작 파트너이자 주주로서, 기술과 사업 양쪽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선점한 것입니다. 뉴스케일 입장에서도 이는 필수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뉴스케일은 혁신적인 설계를 하는 기술 기업이지, 수천 톤의 강철을 다루는 거대한 공장을 가진 제조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설계를 현실로 만들어 줄 세계 최고 수준의 제작 파트너가 반드시 필요했고, 수십 년간 대형 원자로를 제작해 온 두산에너빌리티는 가장 완벽한 파트너였던 셈입니다.
둘째는 지분참여를 통해 SMR 기술 표준화 과정에 대해서 깊숙한 참여를 할 수 있는 이점을 얻었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이제 단순히 뉴스케일이 설계한 도면을 받아 생산만 하는 수동적인 입장이 아닙니다. 설계 단계부터 '제작용이성(Design for Manufacturability)'을 함께 검토하며,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으로 원자로를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는 능동적인 파트너가 되었습니다.아무리 훌륭한 설계를 했다고 하더라도 제조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지 않았다거나, 설계대로 제작할 수 있는 장비나 인력을 확충하는데 천문학적인 규모의 비용이 지출된다고 하면 그런 설계는 사실상 어디에도 사용할 수 없는 무용지물인 셈이기 때문입니다.
💡 제작용이성(Design for Manufacturability)이란?
아무리 뛰어난 설계라도 실제 공장에서 만들기가 너무 복잡하거나 비싸면 상용화될 수 없습니다. '제작용이성'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생산 과정을 고려하여, 용접 지점을 줄이거나 부품을 표준화하는 등 더 빠르고, 더 저렴하며, 더 높은 품질로 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최적화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는 SMR이 대량 생산을 통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입니다.
두산에너빌리티의 뉴스케일파워에 대한 지분 참여는 설계과정에서 이미 여러 협의를 거쳤기 때문에 향후 SMR이 자동차처럼 대량 생산 체제로 전환될 때, 생산 단가를 낮추고 품질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즉, 두산에너빌리티는 SMR 시장의 단순한 하청업체가 아닌,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룰 메이커'의 위치에 서게 된 것입니다. 한국 이외에 이처럼 사용자 편의나 요구에 맞춰 제작을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는 국가는 없습니다.
본론 2: 빅테크를 향한 가장 빠른 다리: 엑스에너지와의 파트너십
뉴스케일과의 동맹이 SMR 시장의 기술적 '표준'을 선점하고 장기적인 기반을 다지는 전략이었다면, **엑스에너지(X-energy)**와의 협력은 AI 데이터센터라는 거대한 신규 수요처를 직접 공략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실리적인 다리를 놓는 전략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두산에너빌리티가 엑스에너지에는 **지분 투자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대신, 4세대 원전 기술을 보유한 엑스에너지와 **전략적 기자재 공급 파트너십**을 맺는 유연한 접근법을 택했습니다.
💡 엑스에너지의 4세대 고온가스로(HTGR)와 TRISO 연료는 무엇이 다른가?
HTGR(High-Temperature Gas-cooled Reactor)은 차세대(4세대) 원자로 기술입니다. 기존 원전이 물을 냉각재로 쓰는 것과 달리, 헬륨 가스를 사용해 750℃ 이상의 초고온에서도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습니다. 이 기술의 핵심은 **'트리소(TRISO)'**라는 혁신적인 핵연료입니다. 모래알 크기의 핵연료 입자를 3중, 4중의 특수 세라믹으로 코팅하여, 사고가 발생해 냉각재가 모두 사라지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연료 자체가 녹아내리지 않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꿈의 연료', '멜트다운 없는(meltdown-proof) 원자로'로 불리며 극강의 안전성을 자랑합니다. 또한, 여기서 나오는 고온의 열은 전기 생산뿐만 아니라 제철, 화학, 그리고 청정수소 생산 등 다양한 산업에 직접 활용될 수 있어 활용도가 매우 높습니다.
이 협력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아마존(Amazon)**과의 강력한 연결고리입니다. 엑스에너지는 최근 아마존의 클라우드 서비스(AWS) 데이터센터에 무탄소 전력을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바로 이 프로젝트에 들어갈 엑스에너지의 SMR(모델명: Xe-100)의 핵심 기자재, 특히 초고온의 헬륨가스를 견뎌야 하는 **원자로 압력용기(Reactor Pressure Vessel)**를 두산에너빌리티가 제작하여 공급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는 두산에너빌리티가 아마존이라는 **글로벌 빅테크, 즉 '최종 소비자'가 선택한 SMR 프로젝트에 핵심 공급사로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엄청난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엑스에너지는 미 에너지부(DOE)의 차세대 원자로 실증 프로그램(ARDP)의 지원을 받아 다우 케미칼(Dow Chemical)의 산업단지에 SMR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어, 두산에너빌리티는 이미 확정된 실제 프로젝트의 일감을 연이어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실리적이고 효과적인 시장 진출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론 3: 전략의 차이: 왜 뉴스케일엔 투자하고, 엑스에너지와는 협력만 할까?
그렇다면 두산에너빌리티는 왜 미국의 유망한 두 SMR 기업에 대해 각각 다른 전략을 취했을까요? 여기에는 시장의 특성과 미래를 내다보는 두산에너빌리티의 정교한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뉴스케일: '플랫폼'에 대한 장기 투자
뉴스케일에 대한 투자는 SMR 시장의 **'표준 플랫폼'을 선점**하기 위한 장기적인 포석입니다. 뉴스케일은 SMR 개발 기업 중 유일하게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가장 엄격한 **표준설계인증(SDA)**을 받은, 기술적 안정성과 상용화 속도에서 가장 앞선 기업입니다. 이는 마치 스마트폰 시장에서 안드로이드나 iOS와 같은 운영체제(OS)를 선점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제조사가 스마트폰을 만들든, 결국 표준 OS 위에서 구동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SMR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렸을 때 뉴스케일의 설계가 '글로벌 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그 플랫폼 자체의 주인이 되어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입니다. 이는 리스크가 있지만 성공할 경우 시장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플랫폼 베팅'입니다.
엑스에너지: '시장 수요'에 대한 민첩한 대응
반면, 엑스에너지와의 협력은 특정 시장과 수요에 대한 **빠르고 유연한 대응 전략**입니다. AI 데이터센터라는 새로운 거대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클라우드 시장 점유율 1위 기업인 아마존과 가장 강력하게 연결된 엑스에너지와 손을 잡고 즉각적으로 사업 기회를 창출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특정 고성능 애플리케이션(앱)의 성공 가능성을 보고, 해당 앱 개발사와 빠르게 협력하여 부품을 공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분 투자라는 무겁고 장기적인 결정 대신, 기자재 공급이라는 유연한 파트너십을 통해 시장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한 현명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뉴스케일의 경수로(PWR) 기술과 다른 4세대 고온가스로(HTGR) 기술의 기자재를 제작하며 **기술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는 효과도 거두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두산에너빌리티는 **'포트폴리오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SMR 시장 전체의 성장을 보고 투자하는 우량주(뉴스케일)와, 특정 시장의 폭발적 성장에 맞춰 빠르게 수익을 낼 수 있는 성장주(엑스에너지 프로젝트)에 동시에 베팅함으로써, 안정성과 성장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는 것입니다.
결론: SMR 생태계의 심장을 쥐고 미래를 만들다
두산에너빌리티의 미국 SMR 시장 전략은 명확하고 정교합니다. 경수로(LWR) 기반의 표준 SMR 시장을 주도할 뉴스케일 파워에는 핵심 주주로 참여하여 기술 표준과 장기적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4세대 고온가스로(HTGR) 기반의 특수 목적 SMR 시장에서는 엑스에너지와 사업 파트너십을 통해 AI 데이터센터라는 폭발적인 시장 수요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투트랙 전략'을 세워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영리하고 대담한 행보를 통해 두산에너빌리티는 이제 단순히 원전 설비를 주문받아 생산하는 제조사를 넘어, 다가올 SMR 시대의 기술과 시장의 흐름을 움직이는 핵심 플레이어이자 없어서는 안 될 존재(Linchpin)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런 행보를 할 수 있는 이유는 기술력에 대한 신뢰성이 어느기업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가장 독보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미-중 기술 패권 경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진영이 '탈러시아, 탈중국 SMR 공급망'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두산에너빌리티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이 새로운 공급망의 심장부에서 가장 중요한 '하드웨어'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게 된 것입니다. AI 혁명의 동력이 될 SMR, 그리고 그 심장을 바로 한국의 대표 기업, 두산에너빌리티가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의 제조업 역량이 미래 에너지 기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강력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