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R의 핵심 차세대 핵연료 'HALEU' 공급망 전쟁 - 차세대 원자로, 러시아, 공급망 재건

목차
서론: 장밋빛 SMR 시대, 그러나 보이지 않는 연료 전쟁
전 세계가 탄소 중립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지금, 소형모듈원자로(SMR)는 그 여정의 '게임 체인저'로 떠오르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의 폭발적인 전력 수요를 감당할 24시간 무탄소 전력원, 송전망이 닿지 않는 외딴 섬과 사막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분산 전원, 심지어 달과 화성 탐사를 위한 우주 기지의 동력원으로까지 SMR의 장밋빛 미래가 다채롭게 그려진다. 빌 게이츠의 테라파워(TerraPower), 엑스에너지(X-energy), 오클로(Oklo) 등 혁신 기업들이 내놓는 4세대 첨단 원자로의 청사진은 인류의 에너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설계된 SMR이라도 그 심장을 뛰게 할 '피'가 없다면, 수조 원짜리 차가운 금속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 '피'가 바로 차세대 원전의 명맥(命脈)을 쥔 **핵연료**이다. 특히 기존 원전 기술을 넘어, 4세대 SMR의 혁신적인 성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차세대 연료, **'HALEU(High-Assay Low-Enriched Uranium, 고순도 저농축 우라늄)'**는 오늘날 SMR 산업의 가장 뜨거운 화두이자, 수면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지정학적 전쟁터가 되고 있다. HALEU의 중요성은 단순히 상업용 SMR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 항공우주국(NASA)이 미래 심우주 탐사를 위해 개발 중인 **핵열추진(Nuclear Thermal Propulsion)** 로켓과 국방부가 전 세계 미군 기지에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추진하는 **'프로젝트 펠레(Project Pele)'**와 같은 마이크로 원자로 사업 역시 HALEU를 필수 동력원으로 삼고 있다. 즉, HALEU는 상업적 에너지 시장을 넘어 우주 탐사와 국가 안보의 영역까지 아우르는 핵심 전략물자인 셈이다. 이 글은 화려한 SMR 개발 경쟁의 이면에 가려진, 그러나 SMR의 성패를 좌우할 진정한 핵심 기술인 HALEU 연료의 제조와 그 공급망을 둘러싼 치열한 지정학적 드라마를 심층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HALEU가 왜 필수적인지, 어떻게 러시아가 이 시장을 독점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에 맞서 서방 세계는 어떻게 '에너지 독립'을 위한 반격에 나섰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SMR 시대를 열기 위한 진짜 전쟁은 원자로 설계실이 아닌, 바로 이 새로운 연료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시작되고 있다.
왜 HALEU인가? - 차세대 원자로를 위한 '고급 휘발유'의 조건
기존의 대형 원자력 발전소는 통상적으로 자연상태의 우라늄에 0.7%만 존재하는 핵분열성 동위원소인 우라늄-235의 농도를 3~5% 미만으로 높인 **저농축 우라늄(LEU, Low-Enriched Uranium)**을 연료로 사용한다. 이를 일반 자동차의 '보통 휘발유'에 비유할 수 있다. 반면, HALEU는 우라늄-235의 농도를 5% 이상, 20% 미만으로 크게 높인 연료다. 이는 자동차로 치면 **'고급 휘발유' 혹은 'F1 레이싱용 특수 연료'**에 해당한다. 20% 이상으로 농축하면 핵무기 제조에 사용될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HEU)으로 분류되어 국제적인 핵 비확산 조약의 엄격한 통제를 받기 때문에, HALEU의 5~20% 농축도는 **'고성능'과 '핵 비확산'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모두 만족시키는 최적의 스위트 스폿(Sweet Spot)**인 셈이다. 4세대 SMR 개발자들이 이처럼 까다롭고 만들기 어려운 '고급 연료'를 고집하는 이유는 HALEU가 가져다주는 압도적인 성능 향상 때문이다.
첫째, 더 작고 더 강력한 심장을 만들 수 있다. 연료의 에너지 밀도(농축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단위 부피당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원자의 수가 훨씬 많아진다는 의미다. 핵분열 연쇄 반응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밀도의 핵분열 물질이 필요하다. HALEU를 사용하면 더 적은 양의 연료로도 연쇄 반응을 유지할 수 있어, 원자로의 핵심인 노심(Core)의 크기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이는 곧 SMR이 추구하는 '소형화'와 직결되는 가장 근본적인 물리적 원리다.
둘째, 경제성의 패러다임을 바꾼다. LEU를 사용하는 기존 원전은 보통 18~24개월마다 가동을 멈추고 복잡한 공정을 통해 연료를 교체해야 한다. 이 기간 동안 발전소는 전기를 생산하지 못해 막대한 기회비용이 발생한다. 하지만 HALEU를 사용하면 연료의 '연소 효율(Burn-up)'이 극적으로 높아져, 연료 교체 주기 없이 **10년 이상, 길게는 수십 년간 연속 운전이 가능**해진다. 이는 SMR을 외딴곳에 설치한 후 별도의 유지보수 없이 오랫동안 가동하는 **'핵배터리(Nuclear Battery)'** 개념을 현실로 만들어준다. 발전소의 가동률을 100%에 가깝게 극대화하고 운영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시켜 SMR의 경제성을 담보하는 핵심적인 요소다.
셋째, 안전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높이며 폐기물까지 줄인다. 일부 용융염원자로(MSR)나 고속로(Fast Reactor) 같은 4세대 SMR 설계는 HALEU의 특성을 활용해 연료 효율을 극대화한다. 특히 테라파워의 '나트륨(Natrium)'과 같은 고속로는 고속 중성자를 이용하여 핵분열 과정에서 생성되는 플루토늄이나 아메리슘 같은 초우라늄 원소(TRU), 즉 독성이 강하고 수십만 년간 방사능을 내뿜는 장수명 핵종까지 다시 연료로 태워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한다. HALEU는 이러한 고속로를 처음 가동시키는 데 필요한 '점화 플러그' 역할을 한다. 이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의 부피와 독성을 획기적으로 줄여, 원자력의 오랜 난제인 사용후핵연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HALEU를 만드는 과정은 기술적으로 매우 까다롭다. 우라늄 농축은 육불화우라늄(UF6) 가스를 수천 개의 원심분리기가 연결된 '캐스케이드(Cascade)'에 주입하여, 미세한 질량 차이를 이용해 우라늄-235를 분리해내는 공정이다. LEU에서 HALEU 수준으로 농축도를 높이려면 캐스케이드를 더 길게 재구성하거나, 농축 공정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하는 기술적 어려움이 있다. 또한 농축도가 5%를 넘어서면서부터는 핵임계 안전(Criticality Safety) 등 훨씬 더 엄격한 안전 및 보안 규제가 적용되기 때문에, 생산 시설의 건설과 운영에 막대한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민간 기업들이 HALEU 시장에 선뜻 진입하지 못했던 기술적, 경제적 장벽이다.
'공급망의 무기화' - 러시아의 계획된 독점과 서방의 위기
문제는 이토록 중요한 HALEU의 상업적 공급망이 지난 수십 년간 **사실상 러시아의 독점 상태**였다는 점이다. 이는 처음부터 의도된 전략이라기보다는, 냉전 종식 이후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과 시장 논리가 낳은 결과였다.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 경쟁을 위해 막대한 양의 고농축 우라늄(HEU)을 생산했지만, 냉전이 끝나자 이 무기급 핵물질은 처치 곤란한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때 양국은 '메가톤을 메가와트로(Megatons to Megawatts)' 프로그램을 통해 러시아의 HEU를 저농축 우라늄(LEU)으로 희석하여 미국의 원자력 발전소 연료로 사용하는 상업적 관계를 맺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서방 세계의 주요 핵연료 공급국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HALEU는 주로 연구용 원자로 등 극히 제한적인 분야에서만 소량 사용되었기에 상업적 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작은 틈새시장을 러시아의 국영 원전 기업 로사톰(Rosatom)의 자회사인 **TENEX**가 유일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서방 기업들은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HALEU 생산 시설에 투자하지 않았고, 이는 **‘SMR이 없으니 HALEU 수요가 없고, HALEU가 없으니 SMR을 지을 수 없다’**는 전형적인 ‘닭과 달걀’의 딜레마를 낳았다. 이러한 불편한 균형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에너지를 무기로 삼아 유럽을 압박하는 러시아의 전략이 노골화되면서, 서방 세계는 자신들의 차세대 에너지 미래가 잠재적 적국의 손에 달려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했다. 이는 단순한 공급망 교란 문제를 넘어, **심각한 국가 안보 위협**으로 부상했다. 로사톰은 단순히 핵연료만 파는 기업이 아니다. 그들은 우라늄 광산부터 농축, 연료 가공, 원자로 설계 및 건설, 운영, 폐기물 처리까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세계 유일의 수직계열화된 국영 독점 기업이다.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는 이집트, 방글라데시 등 개발도상국에 "우리 원전을 사면, 평생 HALEU 연료 공급을 보장해주겠다"는 식의 '패키지 딜'을 제안하며 수십 년에 걸친 지정학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다. 서방이 독자적인 HALEU 공급망을 갖추지 못한다면, 이 거대한 지정학적 게임에서 결코 러시아를 이길 수 없다. 그 충격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빌 게이츠가 설립한 테라파워는 와이오밍주에 건설하려던 자사의 첫 실증로 '나트륨'의 가동 시점을 최소 2년 이상 연기해야만 했다. 그들의 원자로가 처음부터 러시아산 HALEU를 사용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엑스에너지 등 미국의 다른 선도적인 SMR 기업들 역시 당장 자신들의 실증로에 넣을 연료를 구할 길이 막막해졌다. 이 사건은 SMR이라는 첨단 기술의 결정체가, 적국의 연료 공급 중단이라는 구시대적인 지정학적 압박 한 방에 좌초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이는 서방 국가들이 HALEU 자립을 위해 총력전을 펼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에너지 독립'을 향한 총력전 - HALEU 공급망 재건 프로젝트
러시아의 독점에 맞서 서방 세계는 HALEU 공급망을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구축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수십 년간 시장 실패로 방치되었던 영역인 만큼, 이 재건 작업은 민간 기업의 자발적인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진행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단연 **미국 정부**가 있다. 미국 에너지부(DOE)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에너지법 등을 통해 확보한 **7억 달러**를 포함, 막대한 예산을 HALEU 생산 인프라 구축에 투입하고 있다. DOE의 전략은 명확하다. **정부가 초기 HALEU 물량을 대량으로 구매해주는 ‘최초의 고객(First Customer)’ 역할**을 함으로써, 민간 기업들이 시장 불확실성에 대한 걱정 없이 안심하고 생산 시설에 수조 원을 투자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시장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마침내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원심분리기 기술 기업 **센트러스(Centrus Energy)**는 2023년 10월, 오하이오주 파이크톤에 위치한 공장에서 70년 만에 미국 자본과 기술로 HALEU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첫 생산량은 20kg에 불과한 상징적인 수준이었지만, 이는 러시아의 독점 구도를 깨고 서방이 독자적인 HALEU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리는 역사적인 신호탄이었다. 센트러스는 현재 이 시설을 단계적으로 확장하여 연간 900kg의 HALEU를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상업용 SMR 수십 기에 공급할 수 있는 수준의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새로운 생산 시설을 짓는 것 외에, 서방이 가진 또 다른 카드는 바로 냉전 시대에 축적된 **군사용 고농축 우라늄(HEU) 재고를 희석(Downblending)하여 HALEU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는 새로운 공장을 짓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HALEU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테라파워와 같은 첫 실증로들의 긴급한 연료 수요를 해결해 줄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군사적 목적의 전략 자산을 상업용으로 전환하는 복잡한 정책적 결정을 필요로 하며, 장기적인 공급망 해결책이 아닌 단기적인 미봉책이라는 한계도 명확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럽 최대의 농축 기업인 **유렌코(Urenco)** 역시 미국과 영국에 HALEU 생산 시설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으며, 프랑스의 국영 원전 기업 **오라노(Orano)** 등 전통적인 원자력 강국들 역시 독자적인 HALEU 생산 계획을 수립하며 미국의 노력에 동참하고 있다. 이는 특정 국가에 의존하지 않는, 다변화되고 안정적인 서방 주도의 HALEU 공급망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공동의 목표를 향한 움직임이다.
결론: 진정한 '게임 체인저'는 원자로가 아닌 연료에서 시작된다
SMR이 약속하는 청정에너지의 미래는 눈부시다. 그러나 그 미래는 원자로의 혁신적인 설계도나 정교한 컴퓨터 시뮬레이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원자로의 심장을 뛰게 할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연료, 즉 HALEU를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HALEU 공급망 확보 전쟁은, SMR 시대의 기술 및 지정학적 패권을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전장이다. 러시아의 독점에서 벗어나 '에너지 독립'을 쟁취하려는 서방의 총력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며, 수많은 기술적, 경제적, 정치적 난관을 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테라파워와 엑스에너지가 꿈꾸는 4세대 원자로의 혁신은 청사진 속에만 존재하는 '신기루'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상업적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기후 변화 대응의 시급성**과도 직결됩니다. 4세대 SMR이라는 강력한 탈탄소 도구가 눈앞에 있음에도, 연료가 없어서 수년간 건설이 지연된다면 그만큼 우리는 기후 목표 달성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HALEU 공급망 구축은 SMR 산업의 성패를 넘어, 서방 세계의 에너지 안보와 기후 위기 대응 능력까지 판가름할 중대한 과제입니다. 따라서 SMR 산업의 미래를 논할 때, 우리는 원자로의 성능과 경제성과 함께, 그 연료가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는지를 반드시 물어야 한다.
진정한 '게임 체인저'는 바로 그곳, 연료 공급망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